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산 고분군 (문단 편집) == 조사 내용 == ||[include(틀:지도, 장소=금성산 고분군, 높이=224px, 너비=100%)]||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성산리 고분군]]과는 달리 의성군은 비교적 관광사업이 필요한(?) 지역이다보니 사적 정비 사업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에 해당한다.[* 이런 점은 의성뿐만 아니라 다른 상주의 병풍산 고분군이나 성주의 성산동 고분군 등이 해당한다. 다른 대부분 가야 문화권의 지자체들 또한 사정은 비슷하다. 다른 산업이 별로 없는 농어촌 지역이니까 있는 고대 고분군을 정비해 약간의 관광객이라도 유치해보려 하는 것.] 196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탑리 1호분에 대한 조사가 첫 개시였으며 발굴관련 사업이 활발해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 대리리 1, 2, 4호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동안 뜸하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조문국 박물관이 건립되면서 금성산 고분군에 대한 조사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지표조사 및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리리 44호분이 조사되었고, 박물관 관련 시설 부지 내에서도 봉토가 사라진 대형 고분들, 즉 고총이 확인되었다. 금성산 고분군의 3개 구역 중에서 대리리 고분군과 탑리리 고분군에 대형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학미리 고분군에는 상대적으로 소형의 고분들이 있으며 6세기보다 늦은 고분들도 많다. 지금의 사적공원은 대리리 고분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탑리리와 학미리 고분군은 현재 대부분 과수원 및 그냥 산지에 해당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수도 경주에서 사용되던 [[적석목곽묘]]라는 상위 계층의 무덤을 "주 묘제로서' 채용하는 몇 안 되는 고분군이다. 이러한 양상이 보이는 곳은 경산의 [[임당동 고분군]] 정도이다.[* 물론 조금씩 적석목곽묘를 채용하는 고분군들은 흔하다. 대부분의 고총 고분군들이 조금씩은 적석목곽묘를 채용한다. 경주에 가까울수록 잦다.] 부장된 위세품의 내용도 면면히 살펴보면 [[금관]] 빼고는 거의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경주의 중심 고분군들의 출토양상과 같아서 금성산 고분군의 축조세력의 중요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참고로 탑리리 1호분에서는 [[고구려]] 계통의 금동관이 나온 바 있다. 한편, 이른바 의성양식토기라고 불리는 [[신라토기]] 아류 기형을 사용하던 집단의 가장 중심 고분군이기도 하다. 여느 신라의 각 지방에나 지역양식 토기는 꼭 하나씩은 다 있지만 의성양식토기는 다소 독특한 것이 마치 경주양식 토기처럼 [[경북]] 북부지역으로 널리 확산되고 [[영남]]을 넘어서서는 [[강원도]] [[강릉시|강릉]]의 초당동 고분군과 [[충청북도]] [[청원군|청원]] 미천리 고분군에서까지 나타나는 등 여타의 지역양식 토기와는 다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즉, '''특정한 토기 생산망, 유통망의 중심세력''', '''경주의 최상층과 유사한 무덤들'''을 향유하였던 집단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여러 거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역사적 상황에 미루어보면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의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패권을 확보하고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한강유역으로 진출]]을 준비하던 단계였다. 그 과정에서 [[대가야]]를 먼저 정벌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해서는 의성 금성산 고분군을 축조한 세력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일임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위와 같은 [[역사고고학]]적 가치로 인하여 지자체, 조문국박물관과 발굴기관의 협력 속에서 발굴이 이뤄지고 있으며 [[https://kras.or.kr:6033/?mcd=ksc0001&me=bbs_detail&idx=61963|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